“이불 밖은 위험해” : 바이오포비아에 걸린 현대인들

칼럼 · 2021/06/23

기후사회연구소 한빛나라 소장

 

 

“중국에서 가져온 자라라서 방생이 안 돼요. 일주일 키워보시고 반납하셔도 돼요.”

 

생물 체험학습에 아이를 보냈더니 담당 교사가 이런 안내 문자를 보내왔다. 생명권 위의 학습권인가… 씁쓸함도 잠시, 국경을 넘어온 자라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퍽 애처로워 보였다. 사람의 손에 들어온 이상, 수천 킬로미터의 국경은 쉽게 넘었을지언정 다시 야생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토는 야생의 땅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서, 집과 동네 뒷산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 상해와 서울을 넘나드는 것보다 어렵다. 오늘날 생물 대다수에게 있어 영토의 경계는 지리‧기후적 요인 보다 인간의 영향력이 얼마나 미치냐에 좌우되는 것 같다. 중국에서 온 자라를 한국에서 방생하는 것은 안 되지만, 가정집이라면 거기가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디를 보내도 문제가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에 있냐 한국에 있냐가 아니라, 자연에 있냐 가정집에 있냐이다.

 

체험교실에 온 자라는 그렇게 자연과 집의 경계에서 철저히 미아가 되었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우리를 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땅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인간의 영토에서 자연은 고립된다. 고립은 긴장된 대치 상태이며 우리 밖으로 나온 사자가 그렇듯이, 인간의 땅으로 경계를 넘는 순간 자연은 적대적 대상이 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한 번이라도 스스로 자연의 일부라고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 말은 책에서나 읽어본 이야기다.

 

숲이 무서운 현대인들

바이오포비아(Biophobia, 자연공포증)는 현대인이 느끼는 흔한 심리 현상이다. 바이오포비아는 곤충, 뱀 등 자연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 인간과 자연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한 혐오를 포함한다. 분명 주위에서 한두 명은 만나봤을 것이다. 자연은 막상 불편하다. 때로는 불쾌하기도 하다. 베어그릴스는 야생에서 살아남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생태학자 David W. Orr는 바이오포비아의 원인을 자연과 거리를 두는 현대적 삶의 방식에서 찾는다. 바이오포비아는 문화적으로 학습되는 것이다. 자연을 탐험하는 건 즐거운 모험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끝낸 뒤에는 쾌적한 호텔에서 쉬고 싶어 할 것이다. 누구나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습하고 벌레가 득실대는 숲속에서가 아니라 에어컨 달린 전망대에서 경치를 관조할 때다. 현대인은 자연과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연의 껍데기에서 찾은 피상적 아름다움을 소비해왔다. 자연경관 안에 인간은 포함되지 않으며, 우리는 종종 제3자적 시선으로 자연이라는 어떤 덩어리를 바라보는 관찰자 입장을 취한다. 심지어 그 자연경관 안에는 원주민도 등장한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관점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다윈 이전의 이원론적 사고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 모델은 전 세계의 많은 문화권에 만연하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는 세계 도처에 무수한 ‘포비악(phobiac)’들을 탄생시켰다. 안타깝지만 현대 문명은 그렇게 발전해왔다.

 

인간이 처음부터 반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태어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자연과 현대 문명의 경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존과 남태평양에는 현대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원주민들이 있다. 연간 이산화탄소 8.9톤(OECD 회원국 인구당 평균)을 배출하는 현대인들은 다만 그들과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아마존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의 자연관은 오늘날 현대적 도시인들의 자연관과 판이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전통적인 자연관만 해도 지금과 다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설정한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재설정

기후변화가 심화하고 인류세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자연과 인간의 경쟁적 관계를 청산하고 공존‧공생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현대 문명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성찰이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결론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방식대로 이 문제를 풀어가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 자신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서 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적 이기주의는 생명의 본능이다.

 

인간은 자연과 지속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많은 구전동화에서 숲은 종종 두려운 공간으로 묘사된다. 거기엔 “그 숲에 가지 마라”고 일러주는 마을 어른과 숲에 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은 숲속에 신비하고 강력한 마법을 지닌 무서운 존재가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경계를 넘으면서 숲의 금기는 극적으로 극복되고, 마을에는 활기 가득한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우리도 우선 이 둘을 갈라놓은 경계를 뛰어넘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곳은 가봐야 비로소 화해되는 곳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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